주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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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혁후의 역사와 회복
    1.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2. 장 드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
    3. 마담 귀용(Madame Guyon, 1648-1717)
    4. 윌리암 로(William Law, 1686-1761)
    5. 진젠돌프 백작(Count Zinzendolf, 1700-1760)과 모라비아 형제회
    6.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7. 존 넬슨 다비 (John Nelson Darby, 1800-1882)와 영국 형제회
    8. 로버트 고벳 (Robert Govett, 1813-1901)
    9. 펨버 (G.H. Pember, 1837-1910)
    10. 팬튼 (D.M. Panton, 1870-1955)
    11.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12. 제시 펜 루이스 (Jessie Penn-Lewis, 1861-1927)
    13. 웨일즈 부흥 (The Welsh Revival, 1906)

III. 개혁후 역사와 회복

A.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브로드벤트(Broadbent)는 그의 책 순례하는 교회(The Pilgrim Church) 에서 조지 폭스에게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실제에 대하여 잊혀진 진리의 부흥과 회복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1] 폭스는 요한일서 2장 27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조지 폭스와 그와 함께 한 이들은 서로를 “프렌즈(Friends)"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자들은 그들을 ”퀘이커교도들(Quakers)"이라 조롱하며 불렀습니다.

브로드벤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폭스]는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이키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의식하고 있었고 “나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보았고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화목케 하셨고 그분안으로 믿는이 외에는 누구도 참된 믿는이가 아니다...비록 글자로 적혀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나 글자의 도움으로 본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와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했던 것처럼 그분의 즉각적인 영과 능력으로 보았다. 성경을 존중하지 않았지만 내가 성경이 기록된 그 영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성경이 매우 소중했다. 그리고 후에는 주님이 내 안에서 열어 주신 것들인 그 말씀들에 동의하게 되었다.”[2]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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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장 드 라바디 (Jean De Labadie, 1610-1674)

장 드 라바디는 프랑스의 예수회 수도로서 1635년에 신부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는 1650년까지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개혁 교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20년정도 했습니다. 결국 오랜 기간의 실패 후에 그가 깨달은 것은 로마 카톨릭이던 개신교던간에 이미 존재하는 조직으로부터 분별될 때만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캐런(Carron)은 신약 교회 생활의 회복에 대한 라바디의 갈망에 대하여 기술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모든 규례와 의식을 버리고 사도들의 때처럼 단순한 경배로 돌아가는 날이 오기를 소망했다. 그는 “그러면, 그들 모두 모여 말씀을 읽고 전파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만찬에서 사도들의 때처럼 떡과 포도주를 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

개혁을 향한 라바디의 노력은 많은 반대와 협박과 핍박을 일으켰습니다. 개혁 교회는 그의 즉석에서 하는 기도-그의 안에서 솟구치는 것을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라바디는 외형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속 생명 안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60,000명정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주위에 모였고 이로 인해 공동 사회 생활의 모형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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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마담 귀용 (Madame Guyon, 1648-1717)

마담 귀용은 프랑스 카톨릭으로서 주님의 이름에 대한 강한 헌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주님과의 교통의 결과였던 강한 속 생명이 있었습니다. 속생명과 주님에 대한 참된 체험에 무지했기에 루이 14세는 카톨릭 교회와 함께

그녀에게는 주님과의 교통의 결과였던 강한 속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신비주의라고 정죄하며 여러 차례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녀는 성찬을 통하여 은혜를 얻는 일반적인 길을 취하지 않았기에 정죄받았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것들은 불필요하고 오직 그분과 대화하고 깊은 곳에서부터 그분께 열어드리는 것이 필요함을 암시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와 풀려난 후 그녀는 페네롱 신부와 서신왕래를 했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편지와 페네롱 신부의 편지는 카톨릭 교회에 의해 강하게 비난받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 감옥 중에 최악인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은 아직도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책을 읽을 때는 신중해야 하는데 이는 그녀의 실행중 몇몇은 특히 그녀의 육체를 복종시키는 법들은 고행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그분을 향한 헌신과 주님과 그녀의 개인적인 체험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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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윌리암 로 (William Law, 1686-1761)

경건과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초청 이란 제목의 윌리암 로의 책은 존 웨슬리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된 구원의 수단은 은혜가 아니라 때때로 율법의 일인것 처럼 보입니다. 로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만 알고 그리스도가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후에 성령의 능력 이라는 책에서 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며 무할례도 아무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천주교도 아무 것도 아니며 개신교도 아무 것도 아닌데, 이는 둘중 어느 것도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창조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시는 것 외에는 어느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 없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거처”가 된 이들 외에는 그분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4]

성경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며 그 안의 진리들이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실제가 되도록 성령의 내적 역사를 신뢰해야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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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글자를 대비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확신의 범위를 넘어본 적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성경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분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성령의 내주가 그들에게 정통 교리로 들리지만 그들의 삶에는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 안의 죄를 이길만한 힘도 없고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만한 힘도 없다. 많은 이들이 복음전파에 열심이지만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대신 그들은 그들의 성경 교리에 관해 배운 의견들을 신뢰하도록 설득할 뿐이다. 바울과는 반대로 그들의 복음은 말만 있지 성령의 증거나 능력이 없다. 그들은 성령이 그리스도로 그들을 채워 생수의 강이 그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나가야 하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이는 이성(reason)이 그들의 교리의 글자들이 정통이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6]

E. 진젠돌프 백작(주후 1700-1760)과 모라비안 (Count Zinzendorf and the Moravians)

진젠돌프백작과 모라비안들을 통해 회복된 것들을 요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웹사이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교회 생활의 실행은 그들의 시대까지는 아마도 최상이었고 어느 면에서 지방 교회들이 있는 현재의 주의 회복의 단계까지는 최상이었습니다. 그들의 교회 생활이 얼마나 풍성했는지는 놀랍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특징중 하나는 그들이 만든 너무도 많은 찬송들이었습니다.

F.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주후 1703-1791),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 주후 1707-1788)

영국 옥스포드에서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와 조지 위트필드는 홀리 클럽(Holy Club)을 형성해 함께 모여 추구하고 기도하고 매주 주의 상을 갖는 집회가 있는 감리교적 실행들을 발전시켰습니다. 결국 이것은 감리교회로 발전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안들과의 접촉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복음전파에 매우 열심이었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 대게 말을 타고 250,000 마일(mile)도 달렸습니다. 요한 웨슬리, 찰스 웨슬리, 조지 위트필드는 영국과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와 미국전체가 부흥될 정도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웨슬리 형제들 사이에는 진정한 협력이 있었는데 찰스 웨슬리는 요한 웨슬리가 전한 메세지에 곡을 붙였습니다. 찰스 웨슬리는 600여곡의 찬송을 만들었는데 아마도 그가 제일 많은 찬송을 만들었을 겁니다. 웨슬리 형제들은 일부러 찬송을 만들어 진리를 가르쳤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보다는 찬송에서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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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주후 1800-1882)와 영국 형제회

루터와 진젠돌프와 마찬가지로, 다비와 영국 형제회에 대한 더 깊은 내용은 다른 웹사이트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만 고려한다면 형제회의 운동이 개혁보다 더 유력했다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만 고려한다면 형제회의 운동이 개혁보다 더 유력했다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형제회가 형제 사랑의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계3:7-13)에 부합했다고 했습니다.[7] 존 넬슨 다비는 형제회에서 가장 뛰어난 교사였습니다. 최고의 영어 성경 번역중 하나가 다비가 번역한 것인데 그는 성경을 불어와 독어로도 번역했습니다. 개혁시대에 루터가 성경을 연 것이 사실이지만 다비와 형제회를 통해서 성경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성경이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형제회의 주요 인물들은 조지 뮬러(George Muller), 윌리암 켈리(William Kelly), 매킨토쉬(C.H. Mackintosh), 안토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 코테스(C.A. Coates), 로버트 앤더슨경(Sir Robert Anderson)등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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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주후 1813-1901

다음 세 명-로버트 고벳, 펨버, 팬튼-은 함께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왕국과 주님의 다시 오심과 성도들의 휴거에 관한 진리가 회복되었습니다. 비록 이 요점들이 형제회의 존 넬슨 다비와 벤자민 뉴튼에게서 나왔지만 이 세 명이 이 진리들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했습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로버트 고벳은 옥스포드 대학(Oxford University)를 졸업했습니다. 1854년 영국 노르위치(Norwich, England)에 있는 서레이(Surrey)에 예배당을 지어 1901년 2월 그가 죽기전까지 그 곳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고벳은 “신성한 진리의 양면”이라는 놀라운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가 쓴 다른 두 책의 제목은 행위에 따른 보상새 예루살렘 우리의 영원한 집입니다. 그의 책 아포칼립스는 본래 네 권으로 된 책으로 아마도 오늘날 글로써는 계시록을 가장 강하게 다룬 책일 것입니다. 워치만 니는 특별히 이 책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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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펨버 (G.H. Pember) 주후 1837-1910

    조지 호킨스 팸버가 저술한 책 네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구 초기 시대(Earth's Earliest Ages);
    2. 적그리스도, 바벨론, 왕국의 도래 (The Antichrist, Babylon, and the Coming of the Kingdom);
    3. 교회, 교회들, 비밀들 (The Church, the Churches, and the Mysteries);
    4. T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대 예언들 (The Great Prophecies Concerning the Gentiles, the Jews, and the Church of God)

지구 초기 시대의 서문에서 펨버는 말씀을 추구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성경이 위대한 창조주의 오류 없는 말씀임을 믿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언제나 실수 할 수 있고 사람이 어떤 교리의 진실을 알려면 먼저 이미 들은 것에 대해 그것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선익견들을 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쉽사리 볼 것이다. 그후에, 간절한 기도로 성령의 도움을 얻어 성경의 각 부분을 각각의 단순하고 분명한 가르침을 주의하며 여러 다른 문단들이 어떻게 서로 해석되고 확증되는지를 관찰하며 시험해 봐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또 있는데 이는 성경에 나와있는 현저함의 정도를 표시하고 가능한 한 그것과 거의 똑같이 가르쳐야 한다. 심지어는 진실된 교리도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고 과도하게 억압된다면 해가 될 수 있는데 이는 많이 언급될 수록 하나님의 영이 더 중요해 보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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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일반적으로 이런 과정을 추구했다면 곧 진정한 교회 안에 상이점들이 끝났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이들은 온전한 밀집 군대를 가졌을 것이며 복음전파에 가장 큰 방해물이 제해지며 국내와 해외에서의 우리의 전파의 결과 둘 다 매우 달라질 것이다. 예전의 전사가 성령의 검을 날카롭게 번쩍이는 칼집에서 꺼내고 둔하고 무딘 상태로 땅에 떨어져 있던 것을 줍지 않는다면 피할 수 없을 뿐더러 몸과 혼을 쪼개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장 깊숙한 성소까지 쪼갤 것이다.[8]

J. 펜튼 (D.M. Panton) 주후 1870-1955

데이빗 모리스 팬튼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와 유대가 깊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영국 국교회를 떠나 고벳이 죽은 후인 1901년 10월에 써레이 예배당에 대한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 곳으로 바버(M.E. Barber)가 펜튼을 방문하여 교회에 관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팬튼은 1924년부터 죽기전인 1955년까지 새벽(Dawn)이라는 잡지를 편집했습니다. 그 잡지의 기사들의 제목은 다음과도 같습니다:

“믿음이 증가함”(Faith Increased)
“옛 교회”(The Church of Old)
“도둑같이 오심”(Coming as a Thief)
“방해자와 방해물”(The Hinderer and the Hindrance)
“적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제국”(Antichrist's Empire Universal)
“깨어 기도함”(Watchfulness in Prayer)
“성식으로 구원받지 못함”(No Salvation by Sacrament)
“교회와 환난”(The Church and the Tribulation)
“시기를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재림”(A Dateless Advent)
“잃어버린 왕국”(The Kingdom Lost)
“이기는자들을 위한 보상”(The Rewards for Overcomers)
“심판보좌를 세움”(The Setting of the Judgment Throne)
“칠십이레”(The Seventy Weeks)
“그 영이 성전을 떠남”(The Spirit Leaving the Temple)
“세상 제국”(World Empires) 등등

기사의 저자들은 벤자민 윌스 뉴튼(Benjamin Wills Newton), 조지 뮬러(George Muller),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랭(G.H. Lang), 펨버(G.H. Pember), 마가렛 바버(Margaret E. Barber), 팬튼(Pant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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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튼이 죽은 뒤 얼마 안돼 발간된 새벽의 마지막 호는 “고(故) 편집자에 대한 짧은 회상록”이란 기사를 실었습니다. 다음은 그 회상록의 한 부분입니다:

...천연적으로 구속에서 비롯된 모든 구속된 혼의 구속 주에 대한 의무감책임감에 대한 교리는 대부분 교회에서 사라졌는데 확실히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위에 살아있고 긴급한 능력으로서 말이다. 구속자에 대한 이러한 현재 관계의 믿는이에 대한 장래 효과는 대부분 완전히 무시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의무감 있는 대리인으로서 그는 그의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의 청지기 직분에 관한 보고를 드려야만 한다. 그가 신실했는지 성실하지 않았던지, 복종했던지 불순종했는지 거룩한지 죄가 많았던 지에 따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판결을 좋던 나쁘던 받을 것이다.

팬튼은 하나님이 이러한 교리들은 널리 전파하도록 그에게 위임하셨다고 믿었다.[9]

팬튼이 쓴 유명한 두 소책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휴거”입니다.

K.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주후 1828-1917

앤드류 머레이를 통해 속 생명의 체험에 대한 전진된 회복이 있었습니다. 머레이는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주로 그 곳에서 살며 목사와 전도자로서 성도들의 필요를 돌봤습니다. 그는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했는데 이는 그가 만유를 포함한 영에 대한 진리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란 그의 책중 특별히 “영화롭게된 예수의 영”이란 제목의 5과는 성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왔습니다.

L. 제시 펜 루이스 (Jessie Penn Lewis) 주후 1861-1927

제시 펜 루이스는 머레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루이스를 통해 속생명이 더욱 회복되었고 특별히 십자가에 관한 속생명이 회복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영과 혼의 분명한 차이를 보았습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이기는자라는 정기 간행물을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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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웨일즈 부흥 (The Welsh Revival) 주후 1906

웨일즈 부흥은 어느 특정한 개인들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뛰어나거나 특별히 은사있는 사람들과 관계없이 한 것 입니다. 오어(Orr)는 ‘두번째 복음주의 각성’에서 웨일즈 부흥이 복음주의 각성이라 불리는 주님의 커다란 움직임의 세 번째 단계라고 말했습니다.[10] 첫 번째 단계는 1859년 영국 항해 (British Isles)에서 주로 일어났으며 단 한 사람의 지도자도 없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무디역시 각성의 이번 단계로 산출되었습니다. 형제회의 주요 인물이라 언급된 백명중 삼십 오명은 이 때 주님께로 이끌리거나 복음전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보기 드물게 성령과 성경에 의지했습니다.

두번 째 단계인 1873년부터 1899년 사이에 무디는 강하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오어가 많은 기도 집회와 많은 찬송과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자기의 고향땅에서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강한 열심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묘사한 웨일즈 부흥이 있던 때였습니다. 훈련된 성직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 소위 평신도 사역을 더 강조했습니다. 이반 로버츠는 정식 종교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웨일즈 부흥에서 누구보다도 더 역력히 주님이 사용하셨습니다. 보기 드물게 성령과 성경에 의지했습니다. 기도의 영은 강했고 죄에 대해 전복시키는 책망을 가져왔습니다. 밀러의 교회사의 부록에서 윌리암 호스테(William Hoste)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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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길의 주권에 대해 항상 상기하여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어디서 언제 누구에 의해 일한다면, “부흥”이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예를 찾을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이 웨일스(Wales)를 움직이도록 사용한 사람들을 웨일스 이상으로 깊고 멀리 본다면, 전 복음전파의 세상-몇몇 젊은 남녀로서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의 기회도 없었고 재정적인 후원이나 성직의 후원도 없는 이들이었다.[11]

이반 로버츠는 또한 그 부흥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언급했고, 연사들을 위해 헌금을 걷는 것 같은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